📖 폴리스너츠 한글화 작업 후기 — 한 사람의 버킷 리스트가 현실이 되어가는 넉 달의 기록. ① 글자를 가르치다 · ② 검은 화면과의 긴 싸움 · ③ 다 갈아엎고, 전부 새로


프롤로그 — 대사집을 넘기던 소년

고등학생이던 그때, 화면 속의 세계는 분명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다.

조나단 잉그램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25년의 콜드슬립 끝에 깨어나, 사라진 옛 연인의 의뢰를 좇아 우주 거주구 ‘비욘즈’의 그늘로 걸어 들어가는 형사. 화면은 영화처럼 흘러갔고, 음악은 가슴을 눌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등장했다. 단 하나, 그 말들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손에는 늘 대사집이 들려 있었다. 화면을 보고, 종이를 보고, 다시 화면을 보고. 한 줄 한 줄을 짚어가며 진행한 게임이었다. 번역된 종이를 더듬어 따라가는 그 불편함 속에서도, 이상하게 그 이야기와 분위기만큼은 또렷이 마음에 새겨졌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종류의 기억이었다.

그때 했던 다짐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 이게 한글로 나오면, 그때는 종이 없이, 온전히 다시 플레이해보겠다고.

그러나 기다림은 길었다. 게임이 세상에 나온 지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어느새 삼십 년이 가까워졌다. 그동안 수많은 명작이 팬들의 손으로 한글을 입었지만, 폴리스너츠의 차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다.

이 글은 그 결심이 시작된 2026년 2월 27일부터, “한국어 자막이 화면에서 더 이상 잘리지 않는다"는 한 문장이 사실이 되던 6월의 어느 밤까지, 넉 달 동안의 이야기다.


1장 — 게임의 비밀 글자를 배우다 (2월 말)

처음 마주한 벽은 단순했다. 게임은 한국어를 모른다.

세가 새턴이라는 30년 전의 기계는, 자기가 아는 글자밖에 화면에 그리지 못한다. 일본어 글자 하나하나가 작은 점들의 그림으로 기계 안에 박혀 있었고, 그 바깥의 글자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셈이었다. 한글을 보여주려면, 먼저 게임에게 한글이라는 ‘그림’을 가르쳐야 했다.

그래서 게임이 글자를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그려내는지를 한 꺼풀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글꼴 데이터의 구조를 읽어내고, 게임이 “이 자리에 이 글자"라고 적어두는 방식 — 일종의 암호 같은 규칙 — 을 풀어냈다.

그렇게 며칠을 매달린 끝에, 시험 삼아 만든 수십 번째 빌드를 기계에 올렸다. 화면이 깜빡이고 — 처음으로, 한글 한 글자가 떠올랐다. 점 몇 개로 그려진, 작고 투박한 한 글자. 객관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글자였다. 하지만 그건 30년 동안 일본어밖에 모르던 기계가, 난생처음 우리말 한 글자를 그려낸 순간이었다. 화면 앞에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 한 글자가 떴다는 건, 나머지 모든 글자도 결국 뜰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넉 달 여정의 출발 신호는, 그 작은 한 글자였다.

이 무렵 얻은 교훈 하나는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원본 디스크에는 일부러 심어둔 ‘오류’가 있었고, 친절한 마음에 그걸 ‘고쳐’버리면 오히려 게임이 망가진다는 것.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야 할 때가 있다. 30년 전 개발자가 남긴 흔적 앞에서, 함부로 손대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2장 — 메뉴부터, 한 글자씩 (3월 초)

거창한 스토리에 손대기 전에, 먼저 게임의 얼굴인 메뉴부터 한글로 바꿔나갔다.

타이틀 화면, 환경설정, 저장과 불러오기. ‘자동복구장치’ 같은 시스템 문구들. 하나씩 한국어로 갈아끼울 때마다, 게임은 조금씩 더 ‘우리말을 하는’ 물건이 되어갔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같은 글자가 게임 안에서 세 군데, 어떤 건 아홉 군데에 복사되어 있어, 한 곳만 고치면 화면에선 여전히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보이지 않는 모든 사본을 찾아 똑같이 고쳐야 비로소 화면이 바뀌었다. 빠진 곳 하나 없이 끝까지 추적하는, 끈기의 작업이었다.


3장 — 잘리는 말들, 그리고 숨겨진 자막 (3월 중순)

스토리 번역에 손을 대기 전에, 먼저 토대부터 다졌다. 고등학생 때 나를 게임 끝까지 데려가 준 그 대사집을 다시 꺼냈다. 거기에 그동안 흩어져 있던 게임 정보 — 인물들의 관계, 사건의 전말, 세계관 설정 — 을 그러모아 하나의 ‘레퍼런스’로 묶었다. 30년 전 내 손에 들려 있던 그 종이가, 이번엔 번역의 밑바탕이 된 셈이다.

그 위에 번역 가이드를 썼다. 조나단은 하드보일드한 독백체로. 인물들 사이의 말투는 관계에 따라 — 누가 누구에게 반말을 하고, 누구에게 존대를 하는지 — 하나하나 규정했다. 누구의 목소리도 어긋나지 않도록, 세세한 설정을 정해두었다.

그리고 그 방대한 번역의 실무는, 혼자가 아니라 AI 파트너 클로드와 함께 해나갔다. 레퍼런스와 가이드를 건네면 클로드가 대사를 한국어로 옮겼고, 나는 그 결과를 원작의 결과 대조하며 다듬어 되돌려 보냈다. 말투가 어긋난 곳을 짚고, 설정을 보태고, 다시 넘기길 수없이 반복하는 — 길고 지속적인 협업이었다. 번역이라는 거대한 노동을 클로드가 묵묵히 떠맡아 준 덕분에, 나는 이야기의 결을 지키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스토리 대사에 손을 대면서, 가장 끈질긴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어는 짧다. 한 칸에 많은 뜻을 담는다. 그런데 한국어로 옮기면 글자 수가 늘어난다. 게임 속 대사가 들어갈 ‘상자’는 일본어 크기에 맞춰 짜여 있어서, 한국어를 넣으면 끝이 툭 잘려나갔다. “당신의 수사 데이터를 세이브하시겠습니까?“가 화면에선 “…세이브하시겠습"에서 끊겨버리는 식이었다. 의미가 전해지지 않으면 번역이 아니다. 이 ‘잘림’ 문제는, 앞으로 석 달을 따라다닐 가장 큰 숙제가 된다.

그러던 중 큰 발견이 있었다. 성우들이 말하는 음성 대사에는, SZ라 부르던 본문 텍스트와는 별개로, 영상 속에 숨겨진 자막 데이터가 따로 존재했다. 처음엔 보이지도 않던 그 자막의 위치를 찾아내고, 한 블록 한 블록 긁어모아 번역의 사정권에 넣었다. 영상 속 자막, 무비 자막까지 — 게임이 말하는 모든 말을 한국어로 덮을 길이 하나둘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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