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리스너츠 한글화 작업 후기 — 한 사람의 버킷 리스트가 현실이 되어가는 넉 달의 기록. ① 글자를 가르치다 · ② 검은 화면과의 긴 싸움 · ③ 다 갈아엎고, 전부 새로
지난 이야기: 두 달간의 검은 화면 끝에 정렬 오류라는 진범을 잡았고, 게임이 대사를 불러오는 구조의 지도를 손에 넣었다.
6장 — 다 갈아엎고, 처음부터 제대로 (6월 11일)
그리고 6월, 큰 결단을 내렸다.
그때까지의 번역은 게임의 일부 — 도입부와 몇몇 장면 — 에만 손이 닿아 있었다. 실험과 연구를 거듭하며 쌓은 부분 번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게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충분히 알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동안의 부분 번역을 전부 내려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새로 번역하자.
그동안 다져둔 토대 — 레퍼런스와 번역 가이드 — 가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게임의 모든 대사를 통째로 끄집어냈다. 본편 스토리 16,777개의 대사 조각. 세 장의 디스크에 흩어진 음성 자막과 영상 자막 5,500여 개. 그 방대한 말의 바다를, 클로드가 가이드에 따라 한 파일씩 한국어로 옮겨나갔다. game00부터 game1a까지 — 그 속도와 끈기는 놀라웠다. 디스크 1에서 3까지 빠르게 채워진 그날의 커밋 목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라톤 기록이다. 나는 옆에서 쉼 없이 결과를 검수하고, 어긋난 말투를 바로잡고, 다시 넘기길 반복했다.
번역은 단순히 뜻만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가이드대로 조나단의 독백체가 살아 있는지, 인물 사이의 말투가 관계에 맞는지 한 줄 한 줄 짚었다. 검수 과정에서 함정도 여럿 걸러냈다. 추출 과정에서 글자가 깨져 ‘의사’로 보이던 단어가 사실은 ‘군대’였고 (‘물론 군대지’라고 말하던 건 전직 특수부대원 메릴이었다), ‘약’으로 보이던 게 실은 폭탄이 든 ‘가방’이었다. 이런 함정을 클로드와 함께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원작의 결을 지켜냈다.
이번엔 작업 방식도 바꿨다. 매번 손으로 하던 빌드를, 누구나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자동화된 공정으로 새로 짰다. 검증과 리포트가 단계마다 자동으로 따라붙어, 실수가 끼어들 틈을 줄였다. 30년 묵은 게임을 상대하는 일을, 비로소 ‘시스템’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7장 — 새벽의 함정들 (6월 12일)
전량 번역을 게임에 집어넣는 과정은, 새로운 함정의 연속이었다.
디스크에 한국어를 더 담으려고 공간을 늘렸더니, 두 번째 디스크가 아예 부팅조차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새로 만든 공간에 디스크가 인식할 수 있는 ‘겉표지’를 제대로 씌우지 않은 탓이었다. 첫 번째 디스크는 우연히 통과했을 뿐, 두 번째 디스크는 그 빈 공간을 읽다가 그대로 멈춰 섰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규격 하나가 부팅 전체를 가른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도입부 자막이 깨지는 문제도 추적 끝에 잡았다. 데이터를 디스크에 쓰는 방식이 미묘하게 어긋나 자막이 망가졌던 것인데, “화면에 깨진 일본어 한자가 보이면, 그 글자를 역으로 추적해 원문을 복원한다"는 진단법까지 만들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거꾸로 짚어냈다.
그리고 이 무렵, 오래 묻혀 있던 비밀 하나가 드러났다. 영상과 음성에 입혔다고 믿었던 자막들이 — 무비 자막도, 성우 음성 위에 얹히는 자막도 — 어느 순간부터 게임 화면에 아예 나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두 빌드가 아니라, 3월의 어느 패치 이후로 만든 모든 빌드에서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자막을 써넣는 위치가 미세하게 어긋나, 한국어는 분명 디스크 어딘가에 적혀 있는데 게임은 그걸 영영 못 찾는 상태로 석 달을 흘려보낸 셈이었다. 영상은 멀쩡히 재생되고 음성도 들리니, 자막이 통째로 실종됐다는 걸 누구도 알아채기 어려운 종류의 버그였다. 원래 자리를 찾아 일본어 자막을 먼저 되살리고, 그 위에 한국어를 다시 입혔다. 3월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자막들이, 그렇게 석 달 만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무렵엔 게임의 더 깊은 구석까지 한글이 닿았다. 등장인물의 이름표 — 화면에 뜨는 ‘조나단’, ‘에드’, ‘로레인’ 같은 작은 이름 그림 32개 — 를 한글 비트맵으로 갈아끼웠고, 게임 속 백과사전 격인 용어집 196개 항목까지 — 번역은 클로드가 맡고, 나는 그걸 게임에 심었다. 용어집은 특히 까다로워서, 항목을 클릭했을 때 게임이 글자를 찾는 내부 규칙을 정확히 맞춰주지 않으면 클릭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규칙을 하나씩 실험으로 확정해, 마침내 용어집 메뉴까지 한국어로 매끄럽게 동작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8장 — 마지막 아홉 줄 (6월 13일)
그리고 마지막 날, 가장 오래된 숙제와 마주했다. 1편에서부터 따라다닌 그 ‘잘림’.
먼저 게임의 시스템 문구들 — 부팅할 때 뜨는 백업 메모리 선택 화면, “DISC 2로 교체해 주세요” 같은 안내문, 세이브 데이터 초기화 확인창 — 까지 빠짐없이 한글로 바꿨다. 화면 어딘가에 일본어가 반쯤 섞여 어색하던 마지막 구석들이, 그렇게 정리됐다.
그다음, 잘림과의 최종 결전. 2편에서 갈고닦은 ‘빈방으로 옮기기’ 기술을 전면에 투입했다. 잘릴 위기에 놓인 대사 후보가 무려 2,440개. 그중 7,006개의 대사 조각을 새로 마련한 공간으로 옮겨, 잘리지 않게 만들었다. (한 대사가 여러 사본으로 존재하니 숫자가 더 크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옮길 수 없는 딱 아홉 줄이 남았다. 옮겨갈 ‘푯말’을 붙일 자리가 구조적으로 없는, 고집스러운 아홉 줄. 게임06의 한 대사, 게임09의 두 대사, 자동 저장 안내문… 이것들은 기술로 옮길 수 없으니, 번역 그 자체를 다듬어 풀기로 했다. 뜻은 그대로 두되 군더더기를 덜어내, 일본어가 차지하던 칸 안에 한국어를 꼭 맞게 앉히는 일. 클로드와 함께 “당신의"를 덜고, “향한다"를 “간다"로 — 한 자 한 자를 저울에 달듯 줄여, 마지막 아홉 줄을 제자리에서 살려냈다.
그리고 그날 밤, 검증 결과창에 한 줄이 떴다.
SZ / SX / MOV — 전체 잘림 0.
본편 대사 16,777개, 음성 자막 5,443개, 영상 자막 498개. 게임이 화면에 띄우는 모든 한국어가, 단 한 글자도 잘리지 않고 온전히 표시된다는 뜻이었다. 석 달을 따라다니던 숙제가, 그 한 줄로 끝났다.
문득 그 책장 장면을 다시 열어봤다. 추리소설도, 담배도, 잘림 없이 또렷한 한국어로 거기 있었다. 수백 번의 검은 화면을 함께 견딘 두 줄의 대사가, 이번엔 판정관이 아니라 그냥 — 온전한 한국어 대사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에필로그 — 종이 없이, 다시
빌드 697/698. 그 무미건조한 번호 뒤에는, 2월의 첫 한 글자부터 6월의 마지막 아홉 줄까지, 넉 달간의 밤들이 쌓여 있다.
수없이 마주한 검은 화면, 부팅조차 안 되던 디스크, 반쯤만 번역돼 어색하던 화면, 끝이 잘려나가던 대사들. 그 모든 벽 앞에서 멈추지 않은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삼십 년 전, 대사집을 한 손에 들고 화면을 더듬던 한 소년이 했던 약속 하나. 한글로 다시 해보겠다는, 그 약속.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종이 대사집 없이, 화면 속 우리말만 따라가며, 조나단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 긴 길을, 끝내 혼자 걷지는 않았다. 25년의 잠에서 깬 조나단 곁에 늘 동료가 있었듯, 30년 묵은 꿈을 좇는 내 곁에는 파트너 클로드가 있었다. 방대한 번역의 노동을 함께 짊어져 준 덕분에, 나는 이 이야기를 끝까지 우리말로 되살릴 수 있었다.
나온 지 삼십 년이 지난 게임이다. 어쩌면 이제 와서 누가 이걸 다시 할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이야기를 — 그 분위기와 그 여운을 — 한국에서 더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클로드와 함께 한 글자씩 우리말을 입혀나갔다.
아무도 하지 않아서, 내가 했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는 대사집 없이 이 이야기를 만날 것이다.
— 끝, 그리고 시작.